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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덕수궁의 다섯번째 이야기를 포스팅해보려합니다.

덕수궁궐을 나와 조금 걷다보면 정동극장이 나오는데, 그 뒷편으로 미국대사관저 옆에 위치한 중명전에 대해서 글을 올려볼까합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중명원을 가기위해서 석조전을 나와 정동극장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중명원을 가는 길엔 정동제일교회가 보인답니다.

이 길목엔 정동제일교회와 유관순 기념관뿐만 아니라 이화여자고등학교 그리고 프랑스공사관터, 주한캐나다 대사관 등 여러나라의 대사관과 대사관터등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정동극장이 보이자 중명원 표지판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동극장도 서울 가볼만한 곳으로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소개되었던 곳으로 알고 있답니다.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전 다음번에 들리기로 하고 발길을 재촉하려 했으나, 눈에 띄는 문구가 하나 보이더군요.



"이길따라 한걸음씩 너와함께"

이 문구가 저의 발길을 잡더군요.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마음에 들어 사진으로 여러분들과 공유합니다.


중명원 일원 / Jungmyeongjeon Hall Area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 때 궁궐에 포함되었다.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 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처럼 사용되었다. 중명전은 황실 도서관으로 1899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1901년 화재 이후 지금과 같은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중명전 외에도 환벽정, 만희당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들이 있었으나, 1920년대 이후 중명전 이외의 건물은 없어졌다. 중명전은 고종이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1907년 강제퇴위 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채결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The jungmyeongjeon Hall Area formerly was a residential area for Western missionaries. The area was incorporated into the palace premises when Gyeongungung palace(today's Deoksugung Palace) was expanded in 1897. Because the American legation had already been established between here and the main buildings of Gyeongungung Palace, this area was used as a kind of separated palace. Jungmyeongjeon Hall was built as a royal library in 1899. The hall was originally a single-story Western-style building, but is was rebuilt as a two-story building after the original was destroyed by fire in 1901. There were at that time ten more buildings in this area, including Hwanbyeokjeong Pavilion and Manhuidan Hall, as well as Jungmyeongjeon Hall, although all but the latter disappeared during the 1920s. Jungmyeongjeon Hall was used as a temporary residence by Emperor Gojong from 1904, when a fire broke out in the palace, to 1907 when he was dethroned by the Japaneseimperialists. It was here that Korea was coerced into signing the Eulsaneukyak Treaty in 1905. 


위의 설명처럼 중명원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여서 그럴까요? 이 곳에 들어서니 몸과 마음이 다소 무거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곳에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고종 황제께서 계실때 사용되었던 우물도 있었습니다.

중명원은 석조전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곳이였습니다.

석조전은 흰색의 심심한 느낌이였다면 이 곳은 색감있는 적색벽돌을 사용하여 따듯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의 건축물이였습니다.



중명전은 실내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였습니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신어야만 하니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후 입장을 했답니다.



출입문에는 문을 닫아달라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화려하다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답니다.

카펫 위에 유리바닥을 해 놓은건 보존을 위해서겠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제가 보아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인테리어를 보여주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2층은 출입을 금하고 있어 다소 아쉬웠지만, 그 아쉬움을 뒤로하고 천천히 1층을 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왼쪽 방을 들어갔을때 전 깜짝 놀랐답니다.

실물 크기의 을사늑약 현장을 재현해 놓은 곳인데 전 정말 사람들이 앉아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벽면 한켠엔 을사늑약의 체결 일지에 대해 을사늑약문과 을사늑약 체결일지가 적혀있었습니다.


을사늑약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경,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날인하여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무력에 의한 강요 속에 최소한의 절차와 형식도 갖추지 못했던 이 조약은 국제법상 원천적으로 무효인 조약이었다.


위의 내용처럼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원천적으로 무효인 강제체결된 조약이었습니다.

을사오적의 만행으로 나라를 빼앗긴 조약이 되어버렸죠.



위에 보이는 문서가 바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문" 입니다.


을사늑약문 내용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공동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아래에 열거한 조목들을 약속해 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금후에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독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관리와 백성 및 그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책임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격을 띤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 폐하의 아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며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만나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아래 종래 재한국일본 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행사하며 아울러 본 협약의 조항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할 것이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의 조항에 저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이상의 증거로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는다.


광무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

메이지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이 얼마나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조약인가요!!

결국 나라가 힘이 없어 이런 조약을 체결한 것도 있겠지만 나라를 팔아먹는 을사오적을 비롯한 파렴치한 사람들로 인해 나라를 잃었다고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을사오적처럼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만이 대한제국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고종황제께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그리고 이위종등을 특사로 파견하셨답니다. 이분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향하셨죠. 하지만 이미 일본이 손을 써놓은 탓에 이분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이 것이 고종황제께서 헤이그 특사들에게 건네 준 고종황제의 친서입니다.


고종 황제 친서


대한제국 대황제는 삼가 절하며 대프랑스 대통령 각하에게 글월을 올립니다.

귀국과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지내오며 여러 차례 두터운 우의를 입은 바, 지금 우리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고 있어서 모름지기 정의로운 우의로써 우리를 돌보아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불의를 자행하여 1905년 11월 18일 강제로 늑약을 맺었습니다. 그 일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정무대신이 조인하였다고 운운하는 것은 진실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위협을 받아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며, 둘째, 짐은 정부에 조인을 허가한 적이 없으며, 셋째, 정부회의 운운하나 국법에 의거하지 않고 회의를 한 것이며 일본인들이 강제로 가둔 채 회의한 것입니다.


상황이 그런즉 이른바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일컫는 것은 공법을 위배한 것이므로 의당 무효입니다.

짐이 우러러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결단코 응낙하지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이번에 불법 조약으로 국체가 손상됐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어떤 나라가 짐이 이 조약을 응낙 운운하였다고 주장하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원컨대 폐하께서는 믿지도 듣지도 말고 그것이 근거 없는 일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당당한 독립국이 이와 같은 불의스런 일로써 국체가 손상당하였으므로 원컨대 폐하께서는 즉시 공사관을 이전처럼 우리나라에 다시 설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이 사건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공판소에서 공판에 부치려할 때에 공사관을 우리나라에 설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도록 특별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진실로 공법상 당연히 옳은 일이 될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각별한 관심을 쏟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일의 상세한 내용은 짐의 특별위원인 헐버트에게 하문하시면 남김없이 밝혀 줄 것이며 옥새를 찍어 보증합니다.

귀 폐하의 황심과 신민이 영원히 하늘의 도움을 받기를 엄숙히 축원하며 아울러 성체 평안하심을 희구합니다.


대한개국 515년 6월 22일

1906년 6월 22일

한성에서 이경 삼가 올림


고종 황제의 친서에서 나를 생각하는 그 분의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친서가 전달되지 못한게 너무나 아쉬움이 남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전달되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하였을까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뒤로한채 중명원을 나왔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음을 추스리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정동극장을 지나갈때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보았답니다.

곱게 물든 단풍잎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렇게 사진으로 담아보았습니다.




조금 더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더군요.


덕수궁 돌담길도 우리에겐 아픈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 아닐 수 없더라구요.

1959년 영국대사관이 서울시 소유의 땅을 점유해 철대문을 설치하면서 덕수궁 돌담길은 60여년간 막혀있었습니다. 이 길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서울시는 2014년 10월부터 영국대사관과 협의하였고, 지속적인 노력과 설득 끝에 영국대사관 후문쪽 보행길을 개방 할 수 있게되었답니다. 협의를 시작한지 3년만에 이루어낸 결과라고 합니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우리는 이렇게 자유로이 돌담길을 다닐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젠 덕수궁 돌담길 한켠엔 많은 상인들이 노점에서 물건들을 팔고 있었습니다.

직접 만든 공예품부터 맛있는 먹거리들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돌담길 한켠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저도 노점에서 바나나칩과 약과를 구매했습니다.

한 봉지에 5,000원 이더라구요.

무려 10,000원을 지출했답니다.



돌담길 밑에는 떨어진 낙엽들과 돌담길을 배경으로 많은 분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거닐땐 왠지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듣고 싶어지더라구요.



덕수궁 돌담길과 울긋불긋 물든 단풍 그리고 떨어진 낙엽들이 많은 이들에게 좋은 추억거리를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말이죠.

한걸음 한걸음 걸으며, 이 곳의 분위기를 한 껏 느끼고 마음에 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덕수궁 이야기가 오늘로써 갈무리되었네요.

아마도 너무 길어서 많은 분들이 지루하지는 않으셨을까 걱정되는군요.

생애 처음 찾았던 가을의 어느 날 참 많은 역사적 배경을 가진 건축물과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애환등을 배운 날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덕수궁과 덕수궁 돌담길의 포스팅을 끝으로 덕수궁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간략하게 전체적인 스토리를 한 번 더 올릴 예정이긴 한대 자세한 스토리는 오늘로써 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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